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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장 9절)
작성자 미션퍼블릭 등록일 2017-05-10
요한계시록 96편 말씀 중에서 6번째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96편 전체 말씀은 "성경66권설교파일"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 1장 9절)
 < 기다림은 헛되지 않다 >
   
  매주 금요일 부둣가에서 우편물을 실은 똑딱선을 기다리는 76세의 한 퇴역 대령이 있었다. 그는 정부가 약속한 제대연금 수표가 담긴 우편물을 15년째 기다렸지만 그 우편물은 도착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재산은 괘종시계와 그림과 싸움닭인 수탉 한 마리뿐이었다. 그 수탉은 비밀문서를 배포한다고 해서 닭 싸움터에서 사살당한 아들의 유산이었다. 아내는 천식으로 숨쉬기 힘들어하고 가끔 발작도 했다.
   
  10월 어느 금요일 날, 그는 우편물을 찾으러 부둣가로 나갔다. 우체국장이 배에 올라 우편낭을 풀고 그것을 분류한 후 그곳에 모여온 사람들에게 우편물을 건네주었지만 대령에게 온 우편물은 없었다. 기다리는 제대연금 수표가 도착하지 않아서 그는 극심한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1월에 있을 투계에서 자기 수탉이 이기면 큰 수입이 생길 것이란 희망을 가졌다. 문제는 그때까지 수탉을 먹일 옥수수가 없는 것이었다.
   
  다음 주 금요일에도 그는 또 우편선을 기다렸다. 우편선이 도착했지만 그의 우편물은 없었다. 옆에 있던 의사가 자기 우편물을 받고 우체국장에게 “대령님 우편물은 없어요?”라고 묻자 우체국장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대답했다. “아무도 대령님에게 편지를 안 씁니다.”
   
  다음 금요일에도 또 우편선으로 갔지만 역시 그의 우편물은 없었다. 아내가 “이제 기다림을 포기하자!”고 말하면 대령은 “더 기다리자!”고 했다. 제대연금 수표를 기다리던 다른 동료들은 이미 다 죽었다. 그는 20살에 대령이 될 정도로 운이 따랐지만 연금 문제에서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그는 연금이 나오면 아내와 몇 십 년째 가보지 못한 영화구경을 가는 소원도 가졌다. 마지막으로 본 만화영화는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가게에서 외상을 얻을 때는 몇 번이나 사정하며 말했다. “다음 주일까지 갚겠습니다. 약간의 돈이 금요일에 올 예정입니다.” 편지를 기다리는 소망이 간신히 그를 지탱하고 있었다. 아내는 당장 수탉을 처분하라고 했다. 아내는 수탉을 보면 닭 싸움터에서 사살된 아들 생각이 가끔 났다. 아들은 그 수탉이 부자가 되게 해줄 것으로 믿었고 남편도 그랬다. 문제는 그 수탉을 먹이기 위해 자신들이 굶어야 하는 것이었다.
   
  대령도 어떤 대책이 없었다. 유일한 대책은 편지를 기다리며 부둣가를 찾는 것뿐이었다. 그가 또 부둣가를 찾아 우체국장에게 말했다. “급한 항공우편을 기다리고 있소. 오늘은 틀림없이 오기로 되어 있소.” 우체국장이 말했다. “틀림없이 오기로 된 것은 죽음뿐입니다, 대령님.” 허탈하게 귀가하자 아내가 옥수수죽 한 접시를 준비해 그를 맞았다. 죽은 아들의 동료들이 투계 시합 때까지 수탉이 연명하도록 가져다준 옥수수로 만든 죽이었다.
   
  대령이 죽을 먹으며 자조 섞인 어투로 말했다. “삶은 지금껏 발명된 것 중 가장 좋은 거요. 저 수탉이 우리를 삼년은 먹여줄 거요.” 아내가 말했다. “희망을 먹고 살 수는 없어요.” 대령이 말했다. “희망을 먹고 살 수는 없지만 희망이 사람을 지탱시켜 줄 수는 있소.” 다음 날 아내는 은밀하게 안젤 신부에게 가서 결혼반지를 잡히고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했지만 신부는 성스러운 물건을 매매하는 것은 죄라고 하며 거절했다.
   
  아내는 무엇이든 다 팔려고 했다. 괘종시계와 그림도 팔려고 했다. 결국 그들의 굶주림을 이웃들이 다 알게 되었다. 대령은 자존심이 상했고 아내는 며칠씩 냄비를 끓이지 못하는 것을 이웃들이 알까봐 몇 번이나 돌멩이를 끓였다. 대령은 그런 행동을 창피하게 여겼고 아내는 남편의 체면치레에도 질렸고 자신의 오랜 체념에도 질렸다. 아내가 기다림에 지쳐 정부와 의원들을 비난하면 대령은 자기의 마땅한 의무를 수행한 것이라고만 대답했다.
   
  .아내가 부자 친구 얘기를 하면 대령은 그가 당뇨병으로 죽어간다고 말했다. 그러면 아내는 “당신은 허기로 죽어간다. 체면을 먹고 살 수 없음을 알라.”고 했다. 결국 아내가 수탉을 팔자고 하자 남편은 수탉 대신 시계나 그림을 팔자고 했다. 아내가 그것을 팔지 못하면 어떡하느냐고 하면 대령은 “1월 20일까지 기다리자!”는 말밖에 할 말이 없었다. 아내가 수탉이 투계에서 지면 어떡하느냐고 하면 대령은 “자기 수탉은 질 줄 모른다.”고 했다. 그래도 지면 어떡하느냐고 하면 대령은 “그것은 44일 후에나 가서 생각하자.”고 했다.
   
  이 소설은 1982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란 소설 내용이다. 살다 보면 기다림이 절망이 되고 꿈과 비전이 신기루가 될 때가 많다. 그때마다 부둣가에서 우편선을 기다리는 퇴역 대령의 심정이 되지만 그래도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으면 결국 희망의 싹은 튼다.
   
  요새 한국 교회가 힘도 약해졌고 헌신도 약해졌다. 게다가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선교후원도 많이 줄었다. 선교사들의 선교편지를 보면 글의 행간에 어려움이 많이 배여 있다. 그 행간의 의미를 읽어낼 줄 알아야 한다. 어려운 선교지에서 선교편지를 보내고 선교사들은 기대감을 가지고 매주 금요일쯤 되면 한국에서 송금 소식이 있나 하고 인터넷으로 은행계좌를 살펴볼 것이다. 그때 아무도 송금하지 않은 것을 알면 실망하지 않고 “다음 주에는 좋은 소식이 있겠지.” 하고 기다린다. 그 기다림이 사역을 지탱할 힘을 준다.
   
  최근에 월새기(월간 새벽기도) 사역을 하면서 필자도 선교사들의 심정을 일부 체감하고 있다. 200페이지가 넘는 월새기 1권을 1000원에 공급하니까 월새기로 은혜 받은 사람의 헌신과 후원이 없으면 사실상 월새기 사역을 지속시키기 힘들다. 그래서 가끔 선교회 후원계좌로 들어가 볼 때마다 이런 기대를 가진다. “이번 주에는 그분으로부터 혹은 누군가 무명의 헌신자로부터 사랑의 오퍼링(offering)이 있었을까?”
   
  그 기다림이 거룩한 사역을 위해 땀을 흘리게 하는 원천이 된다. 땀이 없고 기다림만 있다면 얼마나 삶이 우울하겠는가? 그러나 열심히 의미 있는 일을 하면서 기다리기에 그 기다림은 희망이 넘치게 된다. 그처럼 절망을 희망으로 만들려면 지금 의미 있는 일에 땀을 흘려야 한다. 삶은 기다림의 연속이고 그 기다림이 희망의 싹이다. 기다릴 사람과 기다릴 것이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특히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성도는 누구보다 행복한 성도다. 그 기다림은 결코 헛되지 않다.
   
  < 사랑과 겸손은 함께 간다 >
   
  본문에는 자기 정체성과 요한계시록을 기록한 장소에 대한 사도 요한의 언급이 나온다. 본문 9절 첫 부분을 보라.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이 표현을 보면 ‘사랑과 겸손’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흔히 사도 요한을 ‘사랑의 사도’라고 부른다. 원래 과격한 성격파였던 그가 그런 별명을 얻은 것 자체가 복음의 능력을 잘 보여준다.
   
  사도 요한은 예수님의 12제자 중 가장 젊었지만 성격은 가장 불같았다. 물불을 가리지 않고 따지고 화를 내는데 심지어는 예수님 보는 데서도 화를 벌컥벌컥 냈다. 그런 성격에는 유전적인 요소도 있었다. 그의 형 야고보도 참지 못하는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또한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 형제의 어머니도 상당히 자기중심적이고 불같은 성격을 가졌음을 알 수 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려고 예루살렘으로 갈 때 12제자를 따로 데리고 가시며 이런 말씀을 했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넘겨져서 십자가에 죽게 되지만 제 3일에 살아날 것이다.” 얼마나 엄숙하고 진지한 순간인가? 바로 그때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와서 말했다. “주님! 저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마 20:21).”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십자가를 지려고 가는 길까지 좇아와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보통 치맛바람이 아니다. 그 모습을 보고 나머지 10제자가 분하게 여겼다. 결국 그 치맛바람으로 오히려 야고보와 요한이 다른 제자들의 질시와 외면을 받게 되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씀했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라!” 섬기면 높아지게 되지만 섬기지 않으면 외면 받게 된다는 말씀이다.
   
  그처럼 세배대 가정의 식구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급하고 불같은 성격을 가졌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님 보는 데서도 화를 벌컥벌컥 잘 냈던 야고보와 요한 형제에게 ‘보아너게(우레의 아들)’란 별명까지 지어주었다(막 3:17). 예수님 앞에서도 불같은 성품을 참지 못했으니까 남들 앞에서는 얼마나 더 심했겠는가? 그런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고 점차 겸손한 사랑의 사도로 변해간 것이다.
   
  본문에 나오는 ‘너희 형제’란 호칭에서도 사도 요한의 사랑과 겸손이 잘 나타나 있다. 사랑과 겸손이 함께 있어야 한다. 겸손이 없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니다. 게다가 ‘너희 형제’란 호칭이 더욱 큰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당시 사도 요한의 위치와 신분과 나이를 생각할 때 그처럼 겸손한 표현은 없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이 쓰일 당시 예수님의 12제자 중 요한만 살아있었다. 그는 당시 교회의 살아있는 성자와 같은 존재였다. 또한 계시록을 쓸 당시 요한의 나이는 90세가 넘었는데 그런 어르신이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라고 했으니 얼마나 겸손한 모습인가? 성도는 신앙생활을 할수록 사도 요한처럼 겸손히 섬겨주는 모습이 나타나야 한다. 스스로 낮아지면 하나님이 높여주신다. 섬김이 없으면 처음 된 자도 나중 되지만 섬김이 있으면 나중 된 자라도 처음 되는 축복을 얻는다.
   
  꿈과 비전과 스케일과 통이 큰 사람이 되면서도 겸손함을 잃지 말라. 겸손해질수록 스트레스가 적어지고 반대로 기쁨의 크기는 커진다. 또한 겸손해질수록 감사가 많아진다. 겸손이 무엇인가? 사람들은 겸손이 높은 자리에서 낮아지는 것이라고 여기지만 사실상 겸손은 본래 자리를 찾는 것이다. 사람의 본래 자리는 낮은 자리다. 원래 낮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낮아지겠다는 것은 현재 마음이 높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낮아지겠다는 생각이 감히 들지 않을 정도로 겸손해야 한다.
   
  사람의 높아지고 낮아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일전에 세상을 떠난 코미디언 이주일은 못 생겨서 아주 어렵고 비참하게 살았다. 그런데 “얼굴이 못생긴 것도 죕니까?”란 말로 뜨면서 못생긴 얼굴 때문에 오히려 최고의 코미디언이 되었다. 그렇게 최고의 명성을 날리면서 평소에 건강관리도 잘했고 정기적으로 암 검진도 받았다. 그런데 갑자기 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얼마나 인간이 연약한 존재인가?
   
  어떤 사람은 가끔 이런 기도제목을 내놓는다. “목사님! 제가 더 겸손하도록 기도해주세요.” 사람이 그토록 겸손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그래도 계속 겸손을 추구하면 하나님이 겸손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실 것이다. 겸손을 잃지 않으면 고난과 상처가 있어도 꿈과 비전과 사명감과 열정을 잃지 않는다. 자기 위치나 자리나 능력에 비해 낮아지면 내적인 기쁨과 보람과 행복과 내일의 보상은 그만큼 커질 것이다.
   
  < 십자가를 질 때 축복 받는다 >
   
  본문을 보면 사도 요한은 자신에 대해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고 표현했다. 성도의 확실한 증거는 세상적인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다. 사실상 우리나라의 10대 재벌 안에는 불신자들이 훨씬 많다. 결국 성도의 확실한 증거는 본문에 나오는 ‘동참’이란 단어에 나타나 있다. 성도는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해야 한다. 즉 하나님의 뜻과 비전 안에서 십자가를 기쁘게 질 줄 알아야 한다. 십자가를 기쁘게 질 때 참된 복을 받는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을 받을 때 사탄은 예수님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가 받아줄 것이라고 했다. 그 말대로 해서 성공했다면 예수님은 일약 당대의 스타가 되었겠지만 예수님은 당대의 스타가 되려고 이 땅에 오시지 않고 십자가를 지려고 이 땅에 오셨다. 사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일을 가장 두려워했기에 그 십자가를 막으려고 이 땅의 영광을 내세워 시험했다. 그런 시험에 넘어가지 말라.
   
  사탄이 주는 영광은 순간적이고 일회용이다. 성도는 신기한 마술적인 삶 대신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십자가의 삶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이 십자가 대신 마술적인 삶을 추구했다면 당대의 스타는 될 수 있어도 영원한 구세주는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성도는 십자가를 지는 삶의 목표를 한시도 잊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려운 일도 맡아야 한다. 참된 축복은 제 몫에 태인 십자가를 잘 질 때 주어진다.
   

  가끔 연말이 되면 중요하지 않은 이유로 봉사 자리를 포기하는 성도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게 하지만 목회자의 마음도 아프게 하고 자기 영혼도 아프게 하는 것이다. 봉사가 끊어지면 대신관계와 대인관계와 대아관계가 다 약해진다. 그러므로 이렇게 고백하라. “하나님! 이제까지 살면서 충성스런 봉사가 부족했던 것을 용서하소서! 앞으로도 계속 써주시고 건강 주시면 더욱 최선을 다해 헌신하겠습니다.”
   
  봉사하다 보면 부딪칠 때도 있고 상처 입을 때도 있지만 그런 일들을 잘 극복해야 십자가를 지는 능력도 커지면서 결국 작품 인생이 된다. 기분과 감정과 상황에 따라 봉사 자리를 쉽게 포기하지 말라. 하나님은 우리를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고 진실한 사랑으로 대하셨다. 그처럼 기분과 감정을 버리고 자기 자리에 충실하며 제 몫에 태인 십자가를 힘써 지면 반드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는다 >
   
  요한계시록은 어디서 기록되었는가? 밧모섬에서 기록되었다. 왜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있게 되었는가? 전설에 의하면 당시 로마의 도미티안 황제가 사도 요한을 죽이려고 온갖 방법을 쓰다가 안 되니까 최후에는 그를 펄펄 끓는 기름에 집어넣었다. 그래도 죽지 않아서 두려움 가운데 밧모섬으로 유배시켰다고 한다.
   
  밧모 섬에 유배된 사도 요한의 모습은 어떤 교훈을 주는가?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는 교훈을 준다. 인간의 생사화복은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다. 이 세상의 어떤 환경도 하나님의 허락을 벗어나 이뤄진 환경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성도라면 아무리 힘든 환경에 있어도 염려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다. 하나님 안에 바로 서 있으면 위기는 반드시 축복의 기회가 된다.
   
  당시 밧모섬은 무인도처럼 척박한 섬으로 사람들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았기에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있었더니”라고 표현하지 않고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라고 표현했다. 즉 소아시아 일곱 교회 교인들이 그 섬의 명칭을 잘 모를 줄 알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나라에 몇 천 개의 섬이 있지만 대부분의 섬들은 한 번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밧모섬도 그런 이름 없는 작고 척박한 섬이었다.
   
  무인도와 같은 섬에 유배되었으니까 사도 요한의 인생이 끝났는가? 아니다. 요한은 거기서 인생 말년에 가장 위대한 사역을 했다. 즉 외롭고 고독하고 갇힌 곳에서 더욱 하나님과 가까워졌고 거기서 미래 역사의 파노라마를 보고 요한계시록을 남기는 위대한 일을 이뤘다. 얼마나 놀라운 반전의 역사인가? 외형과 숫자에 휘둘리지 않고 진리 안에서 환경변화보다 자기변화를 우선시하면 누구든지 그런 역사를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은 상황이 달라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환경의 변화보다 우리 자신의 변화에 더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사람은 막힌 산이 평지가 되길 원하지만 하나님은 막힌 산을 통해 우리가 변화되길 원하신다. 결국 환경에 변화가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네가 먼저 변하라!”는 하나님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 자기 변화는 거부하고 환경변화만 요구하는 모습은 복된 모습이 아니다. 성도는 환경적인 응답이나 해결보다 자기 변화를 우선시해야 한다.
   
  사람은 ‘좋은 해결’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좋은 해석’을 원하신다. 초대교회에 극심한 시련이 닥쳤을 때 당시 성도들은 하나님이 기적적으로 교회를 지켜주실 줄 믿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그러나 오랜 핍박 끝에 결국 교회가 승리하게 하심으로 좋은 해석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주셨다. 즉 핍박으로 교인들을 흩어 선교하게 만드시고 교회를 더욱 순결하게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은 최악에서 최선을 이끌어내시는 반전의 하나님이다.
   
  과거에 실패 때문에 현재의 성공이 있게 된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어떤 사람은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잘 모르겠다고 한다. 그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의 뜻과 섭리를 다 안다고 자처하면 이단이 된다. 사람은 깊은 바다를 두려워하지만 큰 물고기나 큰 배는 깊은 바다를 더 좋아한다. 안전하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처럼 큰 성도는 큰 시련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때 성숙과 변화를 꾀한다. 고난과 시련이 복이나 자랑은 아니지만 하나님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 복되고 자랑스러운 존재로 만들어 가신다.
   
  물고기가 물을 두려워하지 않듯이 성도는 최악의 깊은 바다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잘 믿고 매일 간절히 기도해도 상황은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시련 유무와 믿음 유무는 비례하지 않는다. 진짜 좋은 것은 자기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좋은 것이다. 바울은 남은 많이 치유해주었지만 자신은 평생 질병과 함께 살았다. 그래서 오히려 인물이 될 수 있었다. 하나님은 낮도 만드셨지만 밤도 만드셨다. 왜 하나님이 성도의 상황을 어렵게 만드시는가? 그 과정에서 자기 사명을 따라 성도답게 살라는 뜻이다.
   
  해결보다 해석이 중요하다. 고난도 믿음으로 해석하라. 사람은 고난 때문에 힘든 것이 아니라 고난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것을 해석하면 복된 존재로 변화되면서 그때부터 환경도 따라서 변화된다. 베드로가 변하자 물 위를 걸었고 안 잡히던 고기도 잡혔다. 또한 자신의 빈 배에 예수님을 모시자 물고기가 모여들었다. 내면의 변화는 외면의 변화를 따라오게 만든다.
   
  필자는 천년영향력을 꿈꾸며 <성경전체 강해>의 비전에 매진해 현재까지 3분의 2를 완성했다. 그리고 성도들에게도 자기 분야에서 천년영향력을 꿈꾸며 나아가라고 수시로 도전한다. 성도의 거룩한 비전 성취는 오직 시간문제일 뿐이다. 다만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위해 힘써 동참하고 헌신하면 그 시간이 크게 단축되어 당대에도 크고 위대한 일을 이뤄낼 수 있다. 사람은 실수하고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수와 실패가 없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과 일에 힘써 동참하고 헌신하면 최종적인 의미에서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일은 결코 없다.
   
  요셉이 형제들의 모함을 받아 애굽에 팔려갈 때 얼마나 좌절감이 들었겠는가? 그러나 나중에 애굽의 총리가 된 후 그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형님들! 나를 이곳에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그처럼 자신이 당하고 있는 어려운 현실도 결국은 하나님이 당하게 하신 것이다. 그런 믿음을 가지고 현재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삶의 위기는 축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축복의 원리는 단순하다. 축복을 전용으로 줄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이나 특별한 교회나 특별한 기도원은 없다. 사도 요한처럼 겸손한 사랑으로 무장하고 예수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면 삶의 여정에 고난은 있어도 때가 되면 하나님이 반드시 복된 자리로 이끌어주실 것이다. 늘 사랑과 겸손으로 행하며 실패와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잘 지고 나감으로 인물 성도의 꿈을 이뤄내라.<성경66권설교파일 중에서 스가랴 10번째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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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건강한 리더의 4대 요소 (느헤미야 2장 11-20절) 요삼일육선교회 7104 2018.10.10
105 미래를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다니엘 2장 36-45절) 요삼일육선교회 5286 2018.09.05
104 베드로의 4가지 소원 (베드로후서 1장 12-21절) 요삼일육선교회 7652 2018.08.01
103 복된 아내의 4대 성품 (베드로전서 3장 1-6절) 요삼일육선교회 5851 2018.07.04
102 구원의 6가지 명칭과 의미 (로마서 10장 5-10절) 미션퍼블릭 7269 2018.05.30
101 최선의 변화를 이뤄내는 길 (요한복음 1장 9-13절) 미션퍼블릭 7671 2018.04.25
100 승리하는 교회생활의 원리 (에베소서 2장 19-22절) 미션퍼블릭 7721 2018.03.28
99 대 자유의 은혜 체험 (골로새서 1장 18-23절) 미션퍼블릭 5722 2018.02.28
98 복음의 원리 (로마서 1장 2-7절) 미션퍼블릭 6527 2018.01.31
97 눈물의 힘과 의미 (시편 6편 1-10절) 미션퍼블릭 9016 2018.01.03
96 하나님의 목적에 이끌린 삶 (디모데후서 1장 6-10절)  미션퍼블릭 7973 2017.12.06
95 합심 기도의 능력 (디모데전서 2장 5-8절) 미션퍼블릭 7939 2017.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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