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기 4장 1-6절
'룻기' 21편 말씀 중에서 18번째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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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보다 내일을 소유하십시오 (룻기 4장 1-6절)
< 룻을 얻을 준비를 하는 보아스 >
누가복음 8장 49-56절 말씀을 보면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12살 먹은 외동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집으로 가면서 혈루증 여인을 고치시느라 조금 지체하셨습니다. 그때 죽어 가는 딸을 생각하던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했겠습니까?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갈 때 야이로에게 딸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야이로는 예수님이 얼마나 원망스럽고 혈루증 여인이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에게 “두려워말고 믿기만 하라! 그러면 딸이 구원받는다”고 하시고, 회당장 야이로의 집에 이르러 그의 죽은 딸을 살려 주셨습니다.
이 회당장은 위급한 상황에서도 지체하시는 것 같은 예수님에게 한마디 불평도 없이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지체하시면서 무엇보다 회당장의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처럼 우리는 최선을 다하되 시간의 여유를 가지고 주님께 우리의 기다릴 줄 아는 믿음을 보여드려야 합니다. 주님의 시간표는 더디 가지도 않고 빨리 가지도 않고 가장 정확한 시간에 이루어집니다.
룻이 타작마당에서 밤에 갑자기 이불 속으로 보아스에게 기업 무를 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하자 보아스는 그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결혼 전에 보아스는 기업 무를 자의 책임을 정식으로 넘겨받겠다고 하고 그 밤에 룻에게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그 모든 얘기를 룻으로부터 듣고 시어머니 나오미는 보아스가 모든 일을 슬기롭게 처리할 줄 알고 룻에게 “이 사건이 어떻게 되는 것을 알기까지 가만히 앉아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나오미의 예상대로 보아스는 룻과의 결혼을 위한 사전 정지작업을 폈습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 앉았더니 마침 보아스의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그가 와서 앉으매.”
왜 보아스가 성문에 올라가서 거기에 앉았습니까? 보아스가 앉은 곳은 당시 성읍 사람들에게 오늘날의 재판정과 같은 장소였습니다. 사실 그곳의 의자에는 성읍의 장로급 사람들만 앉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그곳에 보아스가 앉아 있자 마침 기업 무를 우선 권리를 가진 사람이 그곳을 지나갔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자기가 있는 곳에 와서 앉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성읍 장로 10명을 불러 함께 그곳에 앉게 했습니다(2절).
당시 장로들은 지역의 정치적 리더와 종교적 리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에 법적인 다툼이 생겼을 때 재판관 역할까지 했습니다. 그런 장로 10명을 불렀다는 것은 보아스가 그만큼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었음을 말해주고, 기업 무를 권리를 확실히 넘겨받으려는 보아스의 의도가 그 조치에 담겨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정식 재판 절차가 다 완료된 후에 보아스가 말했습니다. 본문 3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관할하므로.” 이 구절에서 ‘관할하므로’라는 말은 애매하게 번역되었는데 정확한 뜻은 ‘팔려고 하므로’라는 말입니다.
계속해서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여기 앉은 자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고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그가 가로되 내가 무르리라.”
보아스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서 기업 무를 우선 권리가 있는 사람에게 나오미가 팔려고 하는 땅을 사라고 하고, 그 땅을 사지 않으면 자기가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습니다. 땅을 사는데 돈은 들지만 그 땅에서 나오는 수확물로 그 이상의 돈을 벌 수 있고, 과부 나오미가 상속자가 없이 죽으면 그 산 땅은 희년에 돌려줄 필요가 없이 영원히 자기 것이 될 것이라는 생각에 그 사람은 그 땅을 사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계산적인 생각은 곧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보아스가 가로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 이름으로 잇게 하여야 할찌니라.”
룻의 시아버지 엘리멜렉에게는 말론과 기룐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아들이 일찍 죽어서 그 가문의 땅은 나오미의 두 자부에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두 자부 중에 오르바는 모압 땅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이제 땅의 권리는 룻에게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그 사실을 기업 무를 자에게 알리고, 룻과 계대 결혼을 해서 룻의 전 남편 말론의 이름으로 그 기업의 땅을 잇게 해줄 책임이 있음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보아스의 말을 듣고 기업을 무를 권리를 가진 사람이 말합니다. 본문 6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기업 무를 자가 가로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나의 무를 권리를 네가 취하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그 가까운 친족은 자신이 땅을 사면 영원히 자기 것이 될 줄 알았는데 룻과 결혼해서 자식이 생기면 그 자식이 엘레멜렉 가문의 이름으로 그 땅을 상속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자기에게는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원래 결정을 번복해 자신의 기업 무를 권리를 보아스에게 넘겨줍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받게 됩니까?
< 현재를 희생하고 미래를 얻으십시오 >
우리는 이 친족의 모습을 통해서 철저히 계산적으로 사는 사람이 결국 손해 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결국 그는 물질적 손해를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지만 그 행동으로 그는 잃은 것이 훨씬 많게 되었습니다.
무엇을 잃었습니까? 먼저 자신의 명성을 잃었습니다. 그도 엘리멜렉 가문의 땅을 살 수 있을 정도로 베들레헴에서 비교적 유력하고 재산도 많은 사람인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의 이름은 수치스런 이름이 되어 룻기의 저자까지 본문 1절에서 “아무개여!”라고 실명을 밝히지 않는 수치스런 대상이 되었습니다.
또한 룻처럼 아름답고 현숙한 여인을 아내로 얻는 기회를 잃어버렸고, 나중에 다윗의 조상이 되고 메시야의 가문이 되는 놀라운 영광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그는 오늘의 재산은 지켰지만 내일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산적으로 사는 사람의 비참한 말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약삭빠른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 조금 더 얻겠다고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지 말고, 주일성수를 범하지 말고, 신앙생활에서 드리고 베풀 줄 모르는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를 드리지 않고 좋은 작품 인생이 나올 수 없습니다. 소금이 맛을 내려면 녹아져야 합니다. 등경 위의 등불이 빛을 내려면 기름이 자기를 불살라 없애야 합니다. 또한 자기를 불사를 때 온전히 불살라야 합니다. 계산하면서 부분적으로 불사르면 빛도 나지만 따라 나오는 연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희생과 헌신과 사랑이 끝까지 순수하고, 끝까지 겸손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희생과 헌신을 하면서 내게 돌아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비계산적인 태도가 우리들을 시험에 빠지지 않게 하고, 우리의 비전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고, 그런 태도에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지방의 한 가문은 몇 백 년 동안 12대 만석꾼으로 부가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무리 부자라도 3대쯤 가면 망한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12대 만석꾼으로 지낼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최초로 부의 문을 열었던 12대 선조가 이런 유언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내 땅에 있는 곳의 100리 이내에는 거지가 없게 하라!” 그처럼 베푸는 가문이었기에 결국 더 얻는 가문이 되었다고 합니다.
신앙인이란 오늘을 희생하고 내일을 얻는 사람입니다. 흘려내는 존재가 축복받습니다. 계산적으로 살면 자신도 불행하게 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자녀도 결국 불행하게 됩니다. 반대로 헌신하며 살면 자신도 행복하게 되지만 자녀도 행복하게 됩니다. 항상 나의 이익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하고 헌신함으로 내일의 축복을 얻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