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의 손을 내밀라
어느 날, 한 여인이 국제회의에서 독일인과 미국인 두 남자를 만났다. 마침 식사 후에 2차 대전 얘기가 나왔다. 그때 미국인이 청년 시절에 파일럿으로 독일의 한 도시를 잔인하게 폭격한 얘기를 꺼내며, 폭격할 때 지붕에 붉은 십자가 표시가 있는 병원을 보면서 인간성에 대한 회의와 공포를 느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던 독일인이 잠시 부르르 떨다가 곧 평정을 찾고 말했다. “그 잔인한 폭격이 있었을 때 그 병원에서 제 아내가 분만 중이었습니다.” 곧 옆에 있던 여인은 슬쩍 회의실에서 나왔다. 두 남자가 서로 껴안고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천국에 가면 상처 준 사람과 상처 받은 사람이 서로 껴안고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때 사랑의 원자탄이 떨어져 천국 여기저기서 화해의 눈물이 파도처럼 몰아칠 것이다.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모습은 화해의 손을 내미는 모습이다. 분명히 내가 싸우는 이유, 내가 그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화해의 손길을 내밀 수 있다면 그 정의감은 파멸시키는 정의가 아닌 사랑으로 세우는 정의가 된다.
두 딸이 어렸을 때 싸우면 서로 남 탓을 했다. 둘째가 말했다. “은혜 언니가 먼저 그랬어요.” 그러면 첫째도 말했다. “한나가 먼저 약을 올렸어요.” 그렇게 서로 남 탓만 하다가 두 아이가 모두 손들고 벌을 서기도 했다. 그때 나는 “누가 먼저 잘못했느냐?”를 알고 싶지 않았고 “누가 먼저 화해의 손을 내미느냐?”를 보고 싶었다.
반면에 가끔 이런 장면도 보았다. 둘째가 말했다. “언니, 내가 잘못했어. 다음부터 잘 할게.” 그러면 첫째도 말했다. “한나야, 나도 잘 할게.” 어린 자녀들이 화해의 손길을 내밀어 화해를 이뤄 가는 모습을 보면 너무 행복했다. 화해의 손은 철든 증거이고 손가락질은 철이 덜든 증거다. 화해의 손은 문명률을 높이고 손가락질은 문맹률을 높인다.
지금 정신적 문맹률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운전 중에 내가 끼어들면 괜찮게 여기고 남이 끼어들면 편찮게 여긴다. 내가 단속당하면 “왜 단속했느냐?”고 섭섭해하고 남이 단속당하면 “잘 단속했어!”라고 시원해한다. 남의 작은 잘못은 원칙 있게 철저히 따지고 나의 큰 잘못은 융통성 있게 대충 지나간다.
승리의 가장 큰 방해 요소는 ‘환경’보다는 오히려 ‘자기’다. 문제 중의 가장 큰 문제는 시간과 물질이 없는 문제가 아니라 ‘자기 포기’가 없는 문제다. 제자란 ‘자기를 제거한 자’다. 짐을 지려고 하지 않는 장식형 제자는 불화를 낳고 짐을 지려고 하는 어깨형 제자는 화해를 낳는다.
백인과 흑인과 황인 모두 빨간 피가 나온다. 피부가 희다고 몸에 도는 피가 흰 것은 아니다. 물질이 있다고 몸에 먹는 물이 다른 것은 아니다. 차이를 제거하려는 이해 능력보다 차별을 제거하려는 화해 능력이 더 중요하다. 문제가 머리의 이해로는 해결되지 않아도 마음의 화해로는 해소될 수 있다. 문제 해결보다 문제 해소가 더 중요한 행복의 원천이다. 이한규의 <상처는 인생의 보물지도> 이웃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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