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언더우드의 선교 비전 >
언더우드는 1859년 런던에서 태어나 13세 때인 1872년 미국으로 이민했고 1880년 뉴욕대학 졸업 후 뉴브런즈윅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처음에 인도 선교 비전을 가졌는데 한 선교대회에 참석했다가 만주의 존 로스 선교사로부터 하나님을 모르고 죽어 가는 1,200만 명의 한국 백성을 위한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간절한 외침을 듣고 한국 선교 비전을 새롭게 가졌다.
그는 뉴욕 장로교 선교 본부로 가서 자신을 한국 선교사로 보내달라고 했다. 당시 선교 본부는 한국에 대한 관심도 없었고 한국을 위한 선교 헌금도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교회로부터 목사 초빙을 받고 한국 선교의 문이 열리기까지 그 교회에 가려고 부임 승낙 편지를 우편함에 막 넣으려고 할 때 하나님이 말씀했다. “한국 선교는 어떻게 하려느냐?” 그때 편지를 우편함에 넣는 대신 선교 본부로 발걸음을 돌렸다.
선교 본부로 가서 새로 부임한 선교 담당 총무에게 물었다. “한국 선교 기금이 들어왔습니까?” 그때 며칠 전 한 후원자가 한국 선교에 써달라고 5,000불을 헌금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내 그는 한국 선교사로 파송 받고 먼저 일본에 입국해서 갑신정변 후 일본에 망명했다가 성도가 된 이수정으로부터 3개월 간 한국말을 배웠다. 마침내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감리교의 아펜젤러 부부와 함께 한국에 도착했다. 그의 한국 복음화의 사명은 ‘보이지 않는 조선인의 마음’이란 언더우드의 다음과 같은 기도문에 잘 나타나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은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지 않는 땅에 저희를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님이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이곳에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중략) 지금은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가 가득한 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될 것을 믿습니다. 주여! 저의 믿음을 붙잡아주소서.”
언더우드는 31년간 한국에서 복음을 전했다. 1911년에는 한국에 처음으로 신구약성경을 완역해 출판했다. 그가 한국에서 개척한 교회, 설립한 병원과 대학, 발행한 신문 등은 모두 한국 역사상 처음 생긴 것으로서 그의 선교 사역을 통해 많은 분야에서 근대화를 이뤘고 세계 최대의 장로교 교단이 한국에서 생겨나는 토양이 마련되었다.
언더우드는 신실하고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뜻과 선교 사명을 위해 목숨을 아깝게 여기지 않으며 사역했고 1916년에 과로로 몸이 쇠약해져서 병 치료차 미국으로 갔다가 그해 10월에 소천했다. 1999년 5월 20일 그의 유해가 미국에서 한국으로 운구 되어 서울 양화진에 있던 그의 아내와 아들 내외의 무덤 옆에 묻혔다. 그토록 사랑하고 다시 보고 싶어 했던 한국 땅에 돌아온 것은 그의 소천 83년 만의 일이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