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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호
작성자 요삼일육선교회 등록일 2018-10-18
신명기 20-27장
11/01(목) 신명기(80) 전쟁과 관련된 규례(1) (신 20:1-9)
11/02(금) 신명기(81) 전쟁과 관련된 규례(2) (신 20:10-20)
11/03(토) 신명기(82) 미지의 피살체 대속 규례 (신 21:1-9)

11/05(월) 신명기(83) 신뢰 관계를 만들라 (신 21:10-17)
11/06(화) 신명기(84) 감사하는 삶을 훈련하라(1) (신 21:18-23)
11/07(수) 신명기(85) 감사하는 삶을 훈련하라(2) (신 21:18-23)
11/08(목) 신명기(86)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사상 (신 22:1-12)
11/09(금) 신명기(87) 순결한 믿음을 가지라(1) (신 22:13-21)
11/10(토) 신명기(88) 순결한 믿음을 가지라(2) (신 22:13-21)

11/12(월) 신명기(89) 가정을 지켜주는 3대 덕목 (신 22:22-30)
11/13(화) 신명기(90)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는 자 (신 23:1-8)
11/14(수) 신명기(91) 선민의 도덕적 생활 규례(1) (신 23:9-18)
11/15(목) 신명기(92) 선민의 도덕적 생활 규례(2) (신 23:19-25)
11/16(금) 신명기(93) 가정을 잘 지키는 길(1) (신 24:1-5)
11/17(토) 신명기(94) 가정을 잘 지키는 길(2) (신 24:1-5)

11/19(월) 신명기(95) 이웃 사랑을 위한 규례(1) (신 24:6-13)
11/20(화) 신명기(96) 이웃 사랑을 위한 규례(2) (신 24:14-22)
11/21(수) 신명기(97) 공의로운 삶을 위한 규례 (신 25:1-4)
11/22(목) 신명기(98) 계대결혼 규례의 교훈 (신 25:5-10)
11/23(금) 신명기(99) 정정당당한 삶을 위한 규례 (신 25:11-19)
11/24(토) 신명기(100)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라(1) (신 26:1-11)

11/26(월) 신명기(101) 감사하는 믿음을 가지라(2) (신 26:1-11)
11/27(화) 신명기(102) 보배로운 성도가 되는 길 (신 26:12-19)
11/28(수) 신명기(103) 기록하는 자가 이긴다(1) (신 27:1-10)
11/29(목) 신명기(104) 기록하는 자가 이긴다(2) (신 27:1-10)
11/30(금) 신명기(105) 말씀에 “아멘!” 하라 (신 27:11-26)
마중물 : 죽는 길이 사는 길
 < 내 부족함을 인정하라 >
   
  얼마 전 남양주 수락산에서 55세 여성이 산악회원들과 정상에서 하강하던 중 등반용 안전벨트에 걸었던 로프를 풀었다. 그때 동료들은 무모한 행동을 하지 말라고 소리쳤지만 그녀는 줄도 없이 맨몸으로 50cm 옆 바윗길로 발을 내딛었다가 실족해 30m 아래로 추락해 숨졌다. 그녀는 8년 경력의 클라이머로 평소 등반기구 없이 맨몸으로 바위를 오르는 볼더링(bouldering)을 즐겼는데 지나친 자기 과신이 화를 불렀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운동능력, 인지능력, 기억력, 판단력이 점차 떨어진다. 문제는 긴 세월에 걸쳐서 조금씩 떨어지기에 능력 저하를 잘 체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자기 몸을 너무 믿지 말라. 쉽게 할 것 같은 일도 막상 해보면 몸이 말을 잘 안 듣는다. 한 아빠는 딸 운동회 때 옛날 실력을 믿고 학부모 달리기에서 1등 하려고 사력을 다해 뛰었는데 생각대로 몸이 안 움직여 답답하고 창피했다고 했다. 사람의 능력은 40대와 50대가 크게 다르고, 50대와 60대가 크게 다르고, 60대와 70대가 크게 다르다.
   
  어르신들이 가끔 “내 몸 같지 않아.”라고 했던 말이 나이가 들면서 점차 자신에게도 실감된다. 젊을 때 운동 신경이 탁월했어도 나이가 들면 계단 하나 내려올 때도 조심해야 한다. 평형감각, 인지능력, 공간지각력 등이 옛날 같지 않아서 점차 내 안에 또 다른 내가 있는 것 같다. 기억력과 판단력도 점차 떨어진다. 다만 많은 경험을 통해 얻은 눈치나 지혜로 떨어진 능력을 커버해 사는 것이다. 그런 사실을 외면하면 무지한 자기 과신으로 인해 남으로부터 무시당하고 소통능력 저하로 고집불통 이미지를 줄 수도 있다.
   
  한 목회자는 총회에 가기 전에 늘 다짐한다. “이번에도 예년처럼 발언을 힘써 자제하자.” 그런 다짐을 하는 이유는 나이가 들면서 말하고 듣고 이해하고 반응하고 변화하는 능력이 이전보다 떨어짐을 인정하고 후배의 기를 살려주고 길을 열어주기 위해서다. 회의 때 소리가 커지고 남의 말을 중간에 끊어 반박하는 이유도 이해력과 기억력과 판단력의 저하와 깊은 관련이 있다. 나이가 들수록 선배 목회자가 총회에서의 발언을 자제하면 후배 목회자들이 더 존중한다.
   
  카페에 가면 젊은이 그룹보다 어르신 그룹의 소리가 큰 편이다. 자기 청력이 약해져서 말소리가 잘 안 들리기에 저절로 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그래서 공공장소에서 필자도 의도적으로 말소리를 낮추려고 한다. 어르신은 자기가 크게 말하는 것을 잘 모를 때가 많고 젊은이들도 왜 저렇게 어르신들이 큰 소리를 내느냐고 의아하게 반응할 때가 많다. 결국 인정과 이해가 동시에 필요하다. 남이 이해해주기만 바라지 말고 내 부족함도 인정해야 갈등도 쉽게 풀린다.
   
  나이가 들면 지각력 저하를 인정해서 이전보다 조금 더 소리를 낮추려고 하고 판단력 저하도 인정해서 이전보다 덜 판단하려고 하라. 또한 기억력 저하도 인정해서 남의 말을 이전보다 더 경청하라. 나이가 들어 약해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것을 인정해야 인생 후반기를 고귀하게 맞을 수 있다. 또한 그런 마음으로 어디서든지 남을 인정해주고 내 부족함을 인정해야 공동체에서도 하나 됨을 이룰 수 있다.
   
  < 고난은 축복의 기회 >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이 백성들의 환호 가운데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어미 나귀 대신 어린 나귀를 탔다. 약하고 경험이 없는 어린 나귀도 예수님의 쓰임을 받았다. 아무리 부족해도 하나님이 쓰시려고 하면 쓰실 수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순수한 성도를 기뻐하신다. 현재의 모습이 부족하고 연약해도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얼마든지 현실을 극복할 수 있다.
   
  예수님은 힘이 없어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십자가를 지셨다. 당시 상황을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었다. 군중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예수님의 입성을 환호하자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낙담해서 말했다. “아무리 예수를 죽이려고 해도 소용없다. 온 세상이 저를 따른다.”
   
  그 장면을 목격한 헬라인 몇이 빌립을 통해 예수님께 면담을 요청했다. 예수님을 헬라 지역으로 모셔서 최고 스승으로 삼고 명예와 부귀영화를 약속하려는 면담일 수도 있었다. 그 면담 요청 사실을 듣고 예수님이 말씀했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출세 기회가 왔으니까 헬라 지역으로 가서 이름을 널리 날리자는 말인가? 아니다. 그때 예수님은 십자가를 각오하셨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신 것이다.
   
  그때 예수님의 말씀을 일부 제자들이 오해해서 “이제 주님이 뜨시면 내게도 한 자리가 생기겠지.”라는 마음을 가지고 제자들 사이에 높은 자리에 대한 다툼도 있었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영광을 얻을 때’는 십자가를 질 때였다. 그처럼 큰 축복 전에는 대개 고통의 순간이 있다. 고난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지라. 그 십자가가 영광으로 가는 통로와 다리다. 영광과 축복을 오해하지 말라.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과 축복도 없다. 죽어야 살고 헌신해야 복 받는다.
   
  어떤 교인은 생각한다. “내가 이렇게 죽어도 상황은 더 어려워지는데....” 무엇이 문제인가? 완전히 죽지 않고 죽은 척하는 것이 문제다. 때로 반전의 역사를 기대하며 선한 결심을 한다. “내가 죽자.” 그래도 상황과 인간관계가 나아지지 않으면 금방 자기가 살아나 하나님께 따진다. “하나님! 제가 이렇게 헌신하고 죽었는데 왜 아직도 문제가 그대로인가요?” 사람에게도 따진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내가 얼마나 참았는데 그렇게 나오는가?”
   
  죽은 줄 알았더니 벌써 살아나 있다. 알고 보니까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한 것이다. 죽은 곳에서는 많은 선한 열매가 맺히지만 죽은 척한 곳에서는 선한 열매가 맺히지 않는다. 선거 때 후보자들은 겸손히 허리를 굽히고 죽은 사람처럼 행동하지만 선거만 끝나면 어느새 허리는 펴지고 머리는 꼿꼿해지고 어깨는 뻣뻣해진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죽은 척한 것’이다. 그런 모습이 신앙생활에 없게 하라.
   
  십자가가 없는 행복은 없다. 축복의 핵심 요소도 십자가의 헌신이다. 학생이 노력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기대하거나 선수가 연습하지 않고 승리를 기대할 수 없다. 십자가를 회피하면 하나님의 축복도 그를 회피하지만 십자가를 기꺼이 지면 하나님도 기꺼이 축복을 내려주신다. 교회의 어떤 필요가 생각나거든 “하나님! 이 필요를 생각나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사님의 리더십의 허락을 받고 이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하고 나설 때 하나님은 그 마음과 헌신을 반드시 기억해주신다. 죽는 길이 사는 길이다.
   
  < 죽는 길이 사는 길 >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는 말씀에 이어 예수님이 말씀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은 ‘자기 희생과 자기 부인’을 상징한다. 희생이 없는 축복은 가치도 없고 진짜 축복도 아니다. 희생과 헌신을 동반한 축복이 진짜 축복이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당연하게 여기라. 삶에는 축복만 있지 않다. 기도제목도 있어야 기도하는 성숙한 성도가 된다.
   
  불신자의 고난과 성도의 고난은 다르다. 불신자의 고난은 ‘당하는 것’이고 성도의 고난은 ‘행하는 것’이다. 신학 주제 중에 란 주제가 있다. 최후의 만찬 후부터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까지의 사건과 의미를 다룬 주제가 <그리스도의 수난>이란 주제다. 수난이란 영어의 passion은 한국어로 ‘열정’으로도 뜻풀이된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예수님이 ‘열정적으로 맞이한 것’이란 암시다.
   
  성도의 고난은 어려운 환경을 수동적으로 맞이하는 것이나 순교 콤플렉스에 젖어 수동적으로 당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이고 능동적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매일 새벽기도는 쉽지 않지만 정열적이고 능동적으로 매일 해야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다.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더 나아가 포용하라. 고난을 포용하고 고난당하는 자를 포용하는 것은 나를 위해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이고 예수님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지면 신비한 축복이 따른다. 능동적인 고난은 더욱 큰 수동적인 고난을 미리 예방하게 한다. ‘당하는 수동적인 고난’을 통해 인생의 쓴맛을 보는 삶보다 ‘행하는 능동적인 고난’을 통해 인생의 기쁨과 보람을 맛보는 삶이 훨씬 복된 삶이다. 능동적인 고난이 수동적인 고난을 막아줌을 기억하고 적극적이고 정열적으로 십자가를 추구하며 남과도 힘써 보조를 맞추라.
 
  나는 100m 가고 싶지만 공동체와 보조를 맞추려고 50m만 가는 것도 일종의 고난이다. 반대로 나는 10m만 갔으면 좋겠지만 100m를 목표로 한 사람과 보조를 맞추려고 50m까지 나아가려는 것도 일종의 고난이다. 내 처지와 기분만 생각하지 말고 남의 꿈과 비전도 힘써 생각해주고 서로 고난의 분량을 지면서 50m 지점에서 만나려는 마음을 가지고 나아갈 때 하나님도 그 공동체에 복을 내려주신다.
   
  헌신과 배려로 썩어지는 한 알의 밀알이 되라. ‘많이 아는 것’을 널리 자랑하지 말고 ‘많이 실천하는 삶’을 은밀히 보여주라. 사명감을 가지고 죽었다고 여기고 하면 극복하지 못할 일이나 환경은 없다. 복의 원리를 멀리서 복잡하게 찾지 말라. 중요한 진리일수록 단순하다. 참된 축복은 자신이 죽어야 다가온다. 더 이상 변명하거나 이해해 달라고 하소연하지 말라. 고통스러워도 깨끗이 죽고 깨끗이 잊으라. 자기를 희생하고 부인하면 조만간 축복의 열매가 풍성히 맺힌다.
   
  인간관계 문제로 갈등하는 한 성도는 말한다. “제가 죽으면 되는데 제가 죽지 않아서 그렇지요.” 정답이다. 그러나 말이나 이론으로만 죽으면 안 된다. 행복을 요구하기보다 행복의 길로 가라. 행복은 내가 죽고 남을 행복하게 해야 주어진다. 죽을 때도 군말 없이 깨끗이 죽어야 한다. 죽는다면서 몸부림과 변명이 많은 것도 문제다. 자기 죽음과 관련된 말씀은 찔림이 크기에 기쁘게 듣기 쉽지 않고 피하고 싶지만 꼭 필요한 말씀이다.
   
  어떤 성도는 말한다. “목사님! 죽으려고 해 보지만 잘 안 됩니다.” 죽으려고 해 본다는 것 자체가 죽는 것이 아니다. 죽는다고 폼만 잡으면 안 된다. 죽는다는 것은 “나 죽었다.”라고 여기저기 알린 후 잠깐 죽은 척 하다가 곧 응답과 열매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려면 썩는 시간도 필요하다. 죽는 척 한 후 곧 응답과 열매를 찾지 말고 지속적으로 자기 죽음을 고백하며 섬겨주고 인내해야 참된 응답과 행복도 주어진다.
   
  < 행복을 위해 기억할 사실 >
   
  행복은 성공과 큰 관련이 없다. 막상 성공하면 성공도 별것 아니다. 성공하고 더 불안해질 때도 많다. 스타는 화려한 무대에서 큰 박수를 받고 겉으로는 성공한 것 같지만 남의 박수를 먹고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은 고달픈 일이다. 인기는 언젠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이 괴롭고 불안해서 약에 의존하는 스타도 있다.
   
  연예인이 인기를 얻으려고 얼마나 노력하고 수고하는가? 그렇게 인기를 얻으면 그 후에는 그 인기를 지키느라 더 고생한다. 혹시 인기를 잃을까 봐 불안과 공포에 싸여 지내고 남을 즐겁게 하면서 정작 자신은 즐겁지 않을 때도 많다. 왜 그런가? 행복의 원리에 대한 오해 때문이다. 행복에 관해 꼭 기억해야 할 사실 3가지가 있다.
   
  첫째, 행복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없으면 참된 행복도 없다. 은혜는 자격 없이 주어지기에 기본적으로 겸손해야 행복해진다. 똑똑함은 행복과 비례하지 않는다. “잘난 나를 남들이 잘 알아주지 않네. 별 볼 일 없는 저 사람이 나보다 잘사네.”라는 높은 마음이 행복을 멀어지게 만든다. 대단하지 않은 것 같은 사람이 의외로 행복하게 잘 사는 이유는 다른 이유는 없다. 그가 겸손하기 때문이다.
   
  둘째, 행복은 깨달을 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많은 것을 가져도 은혜를 깨닫지 못하면 많은 소유가 행복의 감지력만 둔화시킨다. 배부르면 입과 코가 둔해지고 배고프면 입과 코가 예민해지듯이 행복의 감지력도 마찬가지다. 풍족한 아이는 용돈을 많이 받아도 행복감이 덜하지만 가난한 아이는 가끔 용돈을 받아도 크게 행복해한다. 건강할 때는 늘 불평하던 사람이 병들면 건강의 은혜를 잊고 살아왔음을 깨닫고 비로소 은혜에 눈을 뜰 때가 많다.
   
  셋째, 행복은 하나 될 때 주어진다는 사실이다. 남을 위해 나를 제한하면서 남을 행복하게 해야 내가 행복해진다. 요새 혼자서도 행복하게 산다는 사람이 많다. 그것도 좋지만 둘이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고 다수의 공동체에서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되라. 결혼할 때도 “내가 저를 통해 어떻게 행복을 얻을까?”를 계산하면 오히려 행복이 멀어지지만 “내가 저를 어떻게 행복하게 할까?”를 생각하면 오히려 내게 넘치는 행복이 따라온다.
   
  남의 누림에 대해 시기하거나 불편해하거나 뒤에서 험담하지 말라. 누림 중에는 진실하게 흘린 땀의 대가로서 하나님이 축복하심으로 누리게 된 경우도 있다. 그 사실을 외면하고 겉으로 누리는 모습만 보고 시기하면 안 된다. 영화가 끝날 때쯤에는 대개 주인공이 행복하게 잘사는 모습이 나온다. 전반전의 ‘고생하는 장면’은 보지 못한 채 역전승을 이룬 후반전의 ‘누리는 장면’만 보고 시기하고 불편해하면 안 된다.
   
  남의 누림에는 선대의 희생이 씨앗이 된 경우도 많다. 선대의 기도와 땀과 희생의 씨를 뿌린 역사를 보지 못하고 현재의 누리는 모습만 보고 비판하는 사람의 말에 무조건 동조해서 같이 비판하지 말라. 복된 사람이 현재까지 오게 된 과정의 역사를 다른 사람은 대개 잘 모른다. 그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남의 누림에 사치나 불의나 교만이 있지 않다면 그의 누림을 인정해주고 내게도 은혜와 누림의 때가 오도록 믿음의 준비를 하라. 남의 행복을 축하해주는 마음도 힘써 훈련하고 더 나아가 남을 행복하게 해주라.
   
  남편과 아들을 다 잃고 쓸쓸히 귀향하는 가난한 시어머니 나오미가 며느리 룻에게 말했다. “얘야! 너는 앞길이 창창하니 네 갈 길을 찾아서 가라.” 그때 룻은 자기 행복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따랐다. 그런 헌신적인 마음으로 이방 여인인 룻은 메시야 족보에 그 이름을 영광스럽게 올렸다. 행복은 이기적으로 계산하면 얻지 못한다. 팔 걷어붙이고 기쁘게 섬김을 실천해야 남도 행복해지고 나도 행복해진다.
   
  < 하나 됨을 이루라 >
   
  불의한 편이 아니면 힘없는 사람 편에 서주려고 하라. 힘이 있을 때 늘 성찰해야 할 질문은 “내가 힘없는 사람 편에 잘 서주고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힘 있는 편에 서지만 기록과 역사는 힘없는 편에 서서 반전의 역사를 만들어낼 때가 많다. 하나님의 역사와 심판은 더욱 그렇다. 단기간에는 힘이 정의처럼 되는 현실이 많지만 멀리 보고 역사를 보고 사후까지 보면 힘 보다는 진실과 사랑이 정의가 된다. 힘이 있으면 힘을 나눌 생각을 잘하라.
   
  물질적인 나눔도 힘쓰라. 절약이 지나쳐 인색함이 되지 않게 하라. 사치가 아닌 적절한 소비는 살아보려고 애쓰는 경제 활동 주체를 위한 일종의 나눔이고 나라 경제도 조금 더 돌게 하는 동력이 된다. 쓸 때는 기쁘게 쓰라. 부모의 사랑을 “부모라서 죄인이다.”라는 말로 표현하듯이 “돈이 많아서 죄인이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돈을 잘 쓰라. 물론 돈 많은 것이 죄는 아니다. 잘 쓰면 돈은 선의 재료가 된다. 돈 많은 것이 죄가 안 되도록 겸손하게 잘 쓰면 된다. 교회에서도 헌금을 많이 할수록 더 겸손해지면 그의 가치는 더욱 빛난다.
   
  한 부자는 교회 재정의 약 40%를 감당하면서도 늘 겸손하다. 그 전에 헌금을 많이 하면서 마음이 높아져 목회자도 은근히 조종했다가 아픔을 당하고 교회를 옮긴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섬기며 교인들의 사랑과 존중을 받던 교회를 옮기면서 영적인 고독과 상처를 체험했기에 그 후에는 헌금을 많이 해도 마음과 소리를 힘써 낮추자고 다짐했다. 그 다짐대로 살았기에 새로운 교회에서는 더 존중을 받았다. 하나님은 드리고 나누고 베푸는 삶을 통해 돈을 잘 쓰려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행복의 문과 미래의 문을 열어주신다.
   
  세상적인 계산은 오히려 행복을 멀어지게 만든다. 하나님 안에서는 계산이 없는 길이 많이 얻는 길이고 죽는 길이 사는 길이다. 자기를 죽이고 희생의 값을 치러서 하나 되려는 삶이 행복의 초석이다. 하나 됨을 위해서는 희생해야 되지만 하나 되지 못해서 생기는 큰 손해에 비하면 그 희생은 오히려 작은 것이다. 의로운 소수와 약자도 힘써 살피라. 소수와 약자가 아픔을 당하면 다수와 강자도 아픔을 당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바른길에 선 약자와 소수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살펴줄 때 하나 될 수 있다.
   
  국립 대형 정신병원에 가보면 많은 병자를 의외로 적은 사람이 관리한다. 중무장도 필요 없다. 정신이 병들면 하나로 뭉쳐 응축된 힘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병들면 자기가 제일인 줄 알기에 둘도 의견을 합치지 못해서 숫자가 많아도 큰 힘이 생기지 않는다. 개인적이고 자기밖에 모르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이라는 마음이 정신을 병들게 하고 하나 됨을 막는다. 결국 교만은 축복과 행복의 최대 적이다.
   
  쓸 수 있는 힘이 있어도 힘을 절제하고 할 말이 있어도 말을 절제하라. 할 수 있는 일도 다 하지 말고 갈 수 있는 길도 다 가지 말라. 전체의 큰 목적과 덕을 위해 나를 절제하며 오래 참으라. 남이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훈련도 잘하라. 술 취한 남편과 싸우지 말고 술이 깰 때까지 참고 술이 깬 후 할 지혜롭게 말하라. 밀알의 원리를 기억하고 힘써 자기 죽음을 실천하며 살 때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남도 산다. 남의 행복을 위해 나를 제물로 삼으려고 하면 내 삶에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나고 은혜와 행복도 넘치게 된다.
   
  2018년 10월 15일 (월새기 영어판 D-321일)
  이한규 (요삼일육선교회 대표/ 월간새벽기도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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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82 월새기 발간 모음 2024년 5월호 요삼일육선교회 8 2024.04.17
10781 이달의 월새기 네 종류의 마음 밭 (마가복음 4장 10-20절) 요삼일육선교회 62 2024.04.16
10780 온라인새벽기도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 (시편 48편 8-14절) 요삼일육선교회 74 2024.04.16
10779 대표기도 주일예배 대표기도 (전정복집사) 요삼일육선교회 63 2024.04.15
10778 주일설교 십자가를 지는 삶의 복 (마가복음 10장 28-31절) 요삼일육선교회 92 2024.04.15
10777 온라인새벽기도 십자가를 지는 삶의 복 (마가복음 10장 28-31절) 요삼일육선교회 107 2024.04.15
10776 이달의 월새기 백 배의 복을 얻는 길(2) (마가복음 4장 1-9절) 요삼일육선교회 80 2024.04.15
10775 이달의 월새기 백 배의 복을 얻는 길(1) (마가복음 4장 1-9절) 요삼일육선교회 91 2024.04.13
10774 온라인새벽기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유 (시편 47편 1-9절) 요삼일육선교회 109 2024.04.12
10773 이달의 월새기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2) (마가복음 3장 31-35절) 요삼일육선교회 90 2024.04.12
10772 담안편지 담안편지(898) - 나가라 하실 때 나가면 되겠지 하고 있습니다 요삼일육선교회 65 2024.04.12
10771 이달의 월새기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1) (마가복음 3장 31-35절) 요삼일육선교회 86 2024.04.11
10770 온라인새벽기도 하나님을 앞서지 말라 (시편 46편 8-11절) 요삼일육선교회 84 2024.04.11
10769 온라인새벽기도 공휴일 요삼일육선교회 75 2024.04.10
10768 이달의 월새기 성령 충만의 5대 증표(2) (마가복음 3장 20-30절) 요삼일육선교회 831 2024.04.10
10767 온라인새벽기도 주님과 날마다 동행하라 (시편 45편 10-15절) 요삼일육선교회 115 2024.04.09
10766 이달의 월새기 성령 충만의 5대 증표(1) (마가복음 3장 20-30절) 요삼일육선교회 102 2024.04.09
10765 주일설교 예수님을 잘 아는 길 (마가복음 8장 27-38절) 요삼일육선교회 111 2024.04.08
10764 온라인새벽기도 예수님을 잘 아는 길 (마가복음 8장 27-38절) 요삼일육선교회 91 2024.04.08
10763 이달의 월새기 끝까지 제자답게 살라 (마가복음 3장 13-19절) 요삼일육선교회 74 2024.04.08
10762 대표기도 주일예배 대표기도 (허장도집사) 요삼일육선교회 69 2024.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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