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귀를 가지라 (이사야 50장 1-11절)
< 들을 귀를 가지라 >
어떻게 예수님은 십자가 앞에서 흔들리지 않으셨는가? 늘 ‘하늘의 소리’를 들으며 사셨기 때문이다. 요즘 영혼을 유혹하는 ‘세상의 소리’가 얼마나 많은가? 세상의 소리는 대개 “힘이 정의다.”라는 소리로 압축된다.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저항 없이 십자가를 진 예수님의 모습은 무력해 보인다. 예수님은 무력해서 힘을 못 쓴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능력을 안 쓴 것이다. 힘을 안 쓰면서 힘 있는 사람을 굴복시키는 힘이 진짜 힘이다. 힘이 없고 두려워서 저항하지 않는 것은 비굴이지만 힘이 있으면서 조용히 의의 길로 행하는 것은 참된 용기다.
간디나 마틴 루터 킹 목사에게 있었던 의로운 용기의 원천은 ‘들을 귀’였다. 그런 의미에서 매일 하루의 첫 시간을 말씀과 함께 시작하는 사람은 인생 승리의 제일 원천을 가진 사람이다. 결국 본문 4절에 나오는 ‘학자의 혀’와 ‘학자의 귀’가 인생 승리의 2대 원천이다. 기도시간은 혀로 아뢰는 시간이면서 귀로 듣는 시간이다. 귀로 잘 듣는 사람이 말로 잘 아뢸 수 있다. 귀가 열리면 하나님께서 말씀도 주신다.
누구를 만나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상대를 설득할지에 대해 염려하지 말라. 그저 하나님께 마음과 귀를 열라. 그때 말씀도 주어진다. 하나님의 은혜로 귀가 열리고 그 열린 귀를 통해 말씀을 받으면 물러서지 않는 불굴의 용기가 생긴다(5절). 결국 참된 힘과 용기도 ‘들을 귀’에서 생긴다. 귀가 열리면 수많은 축복의 문도 열린다.
아기 엄마는 주변의 큰 소음 중에도 아기의 울음소리를 알아듣는다. 그처럼 세상의 소음 중에도 하늘의 소리를 알아듣는 성도가 복된 성도다. 예수님이 시련 중에도 평안을 잃지 않은 것은 세상의 소리를 뚫고 들려오는 하늘의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들을 귀’를 가지고 세상의 북소리가 아닌 하늘의 북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또한 세상의 비난보다 하나님의 책망을 더 두렵게 여기고 세상의 칭찬보다 하나님의 인정을 더 소중히 여기라.
요새 세상의 소리가 교회 안에도 많이 침투했다. 세상의 소리를 따라 형성된 외적인 교회성장 전략을 따라 하나님의 뜻과 다른 길을 가면 일시적으로는 성장하는 것 같아도 장기적으로는 오히려 후퇴한다. 어떤 일을 결정할 때 중요한 척도는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인가?”가 아니라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이다. 조금 고집스러워 보여도 하나님의 뜻대로 따르려고 할 때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될 수 있다.
더디더라도 정도를 걷고, 홀로 100걸음을 앞서가기보다는 함께 50걸음을 가고, 남을 짓밟고 올라서기보다는 뒤에서 밀어주고 앞에서 당겨주며 함께 나아가는 삶이 교회가 지향해야 할 삶이다. 낭패란 단어에서 랑(狼)과 패(狽)는 모두 이리 과의 짐승인데 그것들은 꼬리가 길어 서둘러 달리다가 제 꼬리를 밟고 넘어질 때가 많다. 그 상황을 묘사한 단어가 낭패란 단어다. 지름길만 찾아 서둘러 가면 반드시 낭패를 본다.<2018.4.3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