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의 위대성 >
그리스도의 탁월성은 믿음생활의 견고한 기초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계속해서 천사와 비교하여 그리스도의 탁월한 점 몇 가지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천사가 불꽃으로 역사하고 바람으로 역사하면 주님은 탁월하신 분이기 때문에 더 큰 불꽃으로 역사하고, 더 놀라운 바람으로 역사해야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하기 쉬운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신비한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증거하십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본문은 십자가의 위대성을 말하면서 크게 두 가지 면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1. 지극한 겸손
본문 11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믿는 사람들은 주님 안에서 다 한 형제입니다. 그래서 서로 형제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직분을 다 없애고 형제라고 부르는 교회도 있습니다.
선교단체로부터 출발해서 교회를 이룬 교회들이 주로 그런 호칭을 씁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집사라는 호칭을 쓰지 않고 형제, 자매라는 호칭을 쓰고, 심지어는 목사나 할아버지에게까지 그런 호칭을 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국 문화에서 그런 모습은 별로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형제, 자매라는 호칭으로 통일되기를 원하는 분들은 대개 이렇게 주장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형제라고 했는데.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따른다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 등의 호칭을 가진다면 계급을 나누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주장을 할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는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주장이 논리적인 근거가 성립된다고 해서 그 주장대로 꼭 실행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형제여!” 했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에게 “주님!”이라고 하지 않고 “형제여!”라고 한다면 한국 문화에서는 신앙의 문제를 떠나서 버릇없게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형제여!”라는 호칭은 나이 많고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나이가 적고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 그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한 겸손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나이도 어린 사람이 형님뻘, 아버지뻘 되는 사람에게 “형제여!”라고 한다면 그건 신앙을 떠나서 기본 인격을 의심받게 만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형제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주님의 지극한 겸손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고, 우리도 겸손한 삶을 살라는 것이지 “우리 다 똑같다.”라고 자기를 높이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므로 앞선 사람은 앞세워주시고, 높은 사람은 높여주십시오. 그리고 항상 겸손한 자세를 가지고 연약하게 여겨지는 자를 형제로 삼는 삶을 실천하십시오.
2. 고난에의 동참
본문은 주님께서 주님의 자녀들처럼 혈육에 속하셨다고 말합니다(14절). 그리고 주님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는데 그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17절). 그러한 모습은 고난에 동참하시고 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주님께서 이렇게 고난에 동참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단순히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하시기 위해서!”라고만 생각을 합니다. 물론 그것이 참으로 중요하지만 더 구체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5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1)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입니다(14절).
세상이 왜 이리 어려울까요? 사단 마귀가 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사단 마귀를 물리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마귀가 역사해서!”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지만 마귀가 우리와 우리 가정을 넘어뜨리기 위해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왜 인간은 어렸을 때부터 곁길로 가려고 합니까? 인간에게 있는 원래부터 있는 죄성 때문입니다. 죄는 어디에서 왔습니까? 사단에게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성과 사단 마귀가 만나면 더 죄가 구체화됩니다. 그러므로 마귀를 물리치는 것은 신앙생활을 승리로 이끄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힘으로는 사단 마귀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단 마귀를 물리칠 수 있을까요? 십자가로 한 번 사망하셨다가 사망을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큰 무기로 활용하는 사단을 꼼짝 못하게 하는 방법이 가장 유용하고 효과적인 방법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를 통해서 사단이 한 번 크게 질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보면 사단은 꼼짝 못하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사단을 이길 수 있는 인간적인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능력은 십자가입니다. 그처럼 사망으로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인 마귀를 물리치기 위해서(14절), 주님께서는 사망을 경험할 수 있는 혈육으로 십자가를 지심으로 고난에 동참하셨습니다.
2)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 종노릇하는 자를 놓아주기 위해서입니다(15절).
왜 사람들이 사단의 노예가 되는 것일까요?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일생 사단의 종노릇하게 됩니다. 죽음의 공포는 자유를 가진 사람을 종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린 학생들을 소매치기로 만들기 쉬운 이유는 그를 잡아다가 굶기고 때리면서 죽음의 공포를 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죽음의 공포로 일생 소매치기로 삽니다.
여학생들을 윤락녀로 만들기 어렵지 않다고 합니다. 여학생을 붙들어다가 일주일만 때리고 굶기고 폭행하면 그 다음에는 스스로 집에 들어가길 포기한다고 합니다. 아무리 곱게 자란 아이도 일단 그렇게 되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본능으로 그곳을 빠져 나오기 힘들게 됩니다.
그런 경우를 보면 사람들은 간단하게 생각합니다. “잠깐 나와 신고하면 되지. 나는 그런 일을 당하면 신고할 거야.” 그러나 말이 쉽지 죽음의 공포에 젖으면 신고도 하지 못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공포를 물리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하지만 그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경찰이 먼저 강도의 소굴로 찾아주어야 다시 자유를 찾게 됩니다.
사단은 마치 극악한 소매치기 두목과 같고 윤락가 두목과 같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죽기를 무서워하기 때문에 사단의 노예가 됩니다. 주님께서 혈육이 되어 우리의 고난에 동참해 주신 것은 강도를 멸하기 위해 대통령이 강도의 소굴로 찾아주신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죽기를 무서워하여 일생 종노릇하는 자를 다시 자유로운 존재로 만들어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3) 아브라함의 자손(믿는 자)을 붙들어주기 위해서입니다(16절).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단순히 영혼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위해 구원의 길을 여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도 구체적으로 붙들어주시기 위해서 혈육이 되셨습니다. 요한복음 10장 9-10절은 우리 영혼의 구원 이상의 것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4)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입니다(17절).
제사장은 백성들의 죄를 대신 속하기 위해서 제물을 가지고 제사하는 일을 맡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은 그런 제사장들의 머리 역할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대제사장은 ‘머리 제사장’이 아니라 ‘위대한 제사장’을 의미합니다. 누가 위대한 제사장입니까? 다른 제물을 가지고 제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제물로 삼아 제사하는 분이 위대한 제사장입니다.
그리고 성경에 구속이라는 단어는 구원이라는 단어와는 다른 단어입니다. 구속이라는 단어에는 구속을 위해서는 피의 대가가 꼭 필요합니다. 피가 어디에서 옵니까? 혈육이 있어야만 피를 흘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피를 흘려 백성의 죄를 구속하기 위해서 주님은 마땅히 혈육이 되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5)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기 위해서입니다(18절).
주님도 시험받으셨습니다! 인간의 시험을 몸으로 느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시험받은 우리들을 능히 도울 수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전지하신 능력으로 인간의 고통을 잘 아십니다. 심지어 주님은 우리 자신보다 우리의 고통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래도 그 고통을 몸으로 같이 느껴주시고 돕기 위해서 혈육이 되셨습니다.
이처럼 우리를 위해 고난에 동참하신 주님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에게도 성육신의 삶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아주 마땅한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머리만의 믿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만의 믿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마음만의 믿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입만의 믿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성육신의 믿음, 즉 구체적인 사랑을 펼치는 '손끝으로 가는 믿음'이 되어야 하고, 영혼을 위해서 전도하는 '발끝으로 가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 진정한 믿음이 됩니다. 항상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주님의 손길에 의지하면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겸허한 심령이 되기를 힘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 주님의 지극한 겸손을 오늘도 배우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연약하고 비천한 자를 형제로 삼을 수 있게 하소서!
죄의 종노릇하는 우리들의 마음에 자유를 향한 갈망이 있음을 알아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지심으로 사단의 정수리를 깨뜨리시고
대 자유를 허락하신 주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게 하소서.”
<성경66권설교파일 중에서 히브리서 7번째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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