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는 결국 승리한다 (시편 58편 1-11절)
< 약자에게 관심을 두라 >
살다 보면 정의의 목소리를 크게 내지만 정의를 따르는 삶이 없는 사람을 종종 목격한다. 때로는 오늘의 정의가 내일에는 불의가 되기도 한다. 또한 정의를 알아도 정의를 실천할 능력이 없는 경우도 많다. 정의롭게 행해야 할 사람이 불의를 행하고 공평하게 재판해야 할 사람이 부당하게 재판하고 책임적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무책임하게 살면 사람들은 의에 대해 회의를 품는다.
다윗은 그런 안타까운 현실을 노래했다. “통치자들아 너희가 정의를 말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 인자들아 너희가 올바르게 판결해야 하거늘 어찌 잠잠하냐(1절).” 통치자들이 정의롭게 행하지 않고 불의하게 판결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썼던 다윗의 이 시편은 셋째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켜 잠시 정권을 잡고 불의하게 행할 때 지은 시편으로 추정된다.
권세자들은 정직하고 공평한 일처리로 정의를 구현해야 하지만 압살롬 치하의 권세자들은 무죄한 사람을 위해 변호하지도 않고 억울한 사람의 마음을 풀어주지도 않고 침묵으로 불의와 부조리를 두둔하고 조장했다. 그런 모습은 복된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은혜만 바라고 사는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에게 특별히 관심이 많다. 교회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아픔과 상처를 어루만져주어야 한다.
물론 무조건 약자 편을 드는 것이 기독교의 사랑은 아니다. 동정심을 이용해 부당한 요구를 하고 불의한 이익을 취하는 약자들도 많다. 기독교의 사랑은 공의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 사랑만큼 공의를 앞세우고 공의만큼 사랑을 앞세워야 한다. 무조건 강자 편이나 약자 편을 들기보다 의로운 자의 편을 들어야 한다. 아들이 뺑소니 사고를 냈으면 불의하게 증거를 조작해서까지 빼내려고 하기보다 당당하게 잘못을 인정하고 처벌을 감수하게 하는 부모가 진짜 아들을 사랑하는 부모다.
불의하고 부당한 판결은 사회적 상처를 낳는다. 더 나아가 불의하고 부당한 판결을 보고도 잠잠한 것은 악을 행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과 같다. 본문 2절을 보라. “아직도 너희가 중심에 악을 행하며 땅에서 너희 손으로 폭력을 달아주는도다.” 이 구절에서 ‘달아’란 표현은 ‘물건을 매단다’는 뜻이 아니라 ‘무게를 단다’는 뜻이다. 결국 “폭력을 달아준다.”는 말은 폭력적으로 불의한 심판을 행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표현이다. 당시 악한 권세자들은 단순히 선을 행하지 않는 정도에서 끝나지 않고 불의하고 폭력적으로 행했다.<2017.1.14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