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왕국에 관한 말씀 (요한계시록 20장 1-6절)
< 천년설을 통한 실제적인 교훈 >
세계적인 기독교 추세를 보면 목회자나 성경학자 중 전천년설자들이 약 80%, 무천년설자들이 약 15%, 후천년설자들이 약 5% 정도 될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이하게 스코틀랜드와 함께 장로교가 강한 나라이기에 전천년설자들이 약 60%, 무천년설자들이 약 35%, 후천년설자들이 약 5% 정도 될 것으로 추산된다. 장로교가 대세인 한국에서도 전천년설자들이 무천년설자들보다 많은 이유는 장로교 목회자 중에도 천년왕국을 문자 그대로 인정하는 목회자가 상당히 많기 때문이다.
천년설에 의해 성경해석의 틀도 크게 달라진다. 전천년설자들은 성경을 ‘평면적 시각’으로 보기에 구약과 신약을 똑같이 중시하고 성경에 나오는 유의한 표현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무천년설자들은 성경을 ‘점진적 시각’으로 보기에 구약보다 신약을 더 발전된 계시로 중시하며 성경에 나오는 유의한 표현들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강하다. 장로교에서도 학자적인 시각을 가진 교수나 목사들은 무천년설을 선호하지만 목회자적인 시각을 가진 목사나 교수들은 전천년설을 선호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자신이 내세우는 천년설로 다른 천년설을 배타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요즘은 유연한 사고를 가지고 서로의 견해를 존중하는 편이다. 진리 문제에서는 확고하되 진리의 적용 문제나 학설차이 문제에서는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 다만 극단적인 종말론자들과 시한부종말론자들이 늘 전천년설의 아류로 등장하기에 ‘전천년설 내의 건전한 종말론’과 ‘전천년설 내의 극단적인 시한부 종말론’을 잘 분별해서 미혹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천년왕국에 관한 말씀을 통해 배우는 실제적인 교훈 중의 하나는 ‘주일에 예배하는 삶의 중요성’이다. 사실상 이 땅에서 가장 천년왕국의 삶이 잘 나타난 삶은 주일에 예배하는 삶이다. 어떤 사람은 주일을 이렇게 표현했다. “주일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천년왕국의 평안이 임하는 시간이다.” 실제로 주일예배를 통해 하나님 중심적으로 사는 것은 이 땅에서 천국 평안을 누리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또한 천년왕국에 관한 말씀은 ‘예수님 중심적인 삶의 중요성’도 교훈한다. 이 땅에 살면서 믿음 때문에 손해를 보고 핍박과 환난을 당하고 심지어는 죽을 수도 있지만 성도는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되어 예수님과 함께 왕 노릇 하게 된다. 그처럼 천국에서 왕 노릇 하는 존재가 되려면 이 세상에서 왕 노릇 하면 안 된다. 왜 인생에 문제가 생기고 교회에 문제가 생기는가?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는 거듭나지 못한 사람의 유치한 왕 노릇 때문이다.
‘어린아이의 순수한 믿음’과 ‘어린아이의 유치한 믿음’은 크게 다르다. 젖만 좋아하고 밥을 먹지 못하는 믿음은 유치한 믿음이다. 즉 조금만 바른 말씀이나 부담되는 말씀이나 어려운 말씀을 하면 “교회가 여기밖에 없나!” 하는 모습도 유치한 모습이고 서열을 따지고 파당을 짓고 문제가 생기면 기러기 떼처럼 무리지어 날아가거나 날아오는 모습도 유치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들은 예수님을 삶을 중심에 놓지 않아서 생기는 모습들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자기 안에 참된 보화가 있는 사람이다. 자기 안의 보화는 그 가치를 인식할 때만 의미 있게 된다. 옛날에 러시아가 미국에게 알래스카를 팔려고 부단히 노력해서 마침내 8년간의 교섭 끝에 720만 달러를 받고 팔았다. 그리고 귀찮은 땅을 고가에 팔아버렸다고 좋아했지만 지금 그 땅은 지구 최대의 자원 보고가 되었다. 폐허인 줄 알았던 땅 안에 엄청난 보화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성도의 겉모습이 아무리 초라해보여도 그 안에는 예수님이란 엄청난 보화가 있다. 그 보화에 눈을 뜨고 그 보화를 위해 어떤 희생도 치르려고 할 때 축복과 행복의 가능성은 커지고 이 땅에서 천년왕국의 평안을 누릴 수 있게 된다. 그 사실을 인식하고 늘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놓고 겸손하게 살면서 이 땅에서 천년왕국의 평안을 누리고 마침내 천국에서 예수님과 영원히 왕 노릇하며 살게 될 거룩한 소망을 가지라.<2016.6.25 월간새벽기도 중에서 발췌>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