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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 (누가복음 7장 36-50절)
작성자 미션퍼블릭 등록일 2012-05-21
누가복음 7장 36-50절
(36절) 한 바리새인이 예수께 자기와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이에 바리새인의 집에 들어가 앉으셨을 때에/ (37절)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가 있어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심을 알고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38절)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으니/ (39절) 예수를 청한 바리새인이 그것을 보고 마음에 이르되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며 어떠한 자 곧 죄인인 줄을 알았으리라 하거늘/ (40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절) 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절) 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43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 이르시되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마음 (누가복음 7장 36-50절)
 (알림) 온새기 월요일말씀과 홈페이지 주일설교의 차이 
  • 매주 월요일은 전날의 주일설교를 일부 발췌해서 온새기(온라인 새벽기도)로 보내는 날입니다.
  • 오늘은 어제 주일설교의 약 60%를 발췌해서 보냅니다. 
  • 주일설교 100% 원문을 보기를 원하면  본 홈페이지 '주일설교' 란에서 보시면 됩니다

  <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헌신 >
 
   어느 날, 캐나다에서 백인 교회당을 빌려 예배드리는 한 한인 이민교회가 지역의 한인 노인들을 위한 노인회 행사를 개최했습니다. 그때 한인 목사님은 자신이 설교 준비를 하고 백인교회 목사님에게 성경 봉독을 부탁드렸습니다. 그런데 소통이 잘못되어 백인 목사님이 성경 봉독 후에 그냥 설교까지 했습니다. 갑자기 통역해야 할 상황이 되어 목사님이 고민하는데 하나님이 이런 확신을 주셨습니다. “네가 준비한 설교를 그냥 전하라.”
 
   통역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배짱입니다. 그래서 백인 목사님이 설교하면 목사님은 통역하는 척 하면서 자기가 준비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자 어르신들이 큰 은혜를 받고 예배 후에 말했습니다. “목사님! 그렇게 영어를 잘하는지 몰랐습니다.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예배당을 나서는데 갑자기 문 앞에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유학생이 서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당황해서 물었습니다. “자네 어떻게 된 일인가?” 그가 말했습니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왔다가 뒤에서 목사님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목사님 배짱이 대단하시던데요.”
 
   숨긴 것은 언젠가 드러납니다. 충성도 고난의 시험을 당해봐야 그 진위가 드러납니다.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질문하면 자기 시켜달라고 “저요! 저요!”라고 손들지만 그 표시로는 실력을 잘 모릅니다. 그러나 시험을 쳐보면 감춰진 실력이 다 드러나고 그 점수에 따라 진로가 달라집니다. 교회에서도 힘써 충성하면 앞날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갚아주시고(계 22:12),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갈 6:7). 그처럼 진실한 충성과 헌신은 나중에 엄청난 이자가 붙어 열매로 돌아올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집사가 천국에 간 꿈을 꿨습니다. 그때 한 저택을 천사가 공사하고 있어서 물었습니다. “천사님! 저 집은 누구 집인가요?”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네 담임목사 집이다.” 그러자 그는 “야! 우리 목사님 좋겠네요.”라고 하며 다시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천사님! 제 집은 어디에 있나요” 천사가 말했습니다. “네 집은 보지 않는 것이 좋다.” 그가 졸랐습니다. “그래도 보고 싶어요. 제발 보여 주세요.”
 
   너무 졸라대서 할 수 없이 천사가 그를 한 작은 초가집으로 인도한 후에 말했습니다. “이것이 네 집이다.” 그가 큰 충격을 받고 말했습니다. “천사님! 어떻게 이런 초가집에서 영원히 사나요? 너무 불공평해요. 좋은 곳으로 이사 가게 해주세요.”
 
   그때 천사가 말했습니다. “불공평이 진짜 공평이다. 심은 대로 거둔다. 천국 집은 땅에서 헌신한 대로 지어져서 천국에는 이사가 없다.” 그 이사가 없다는 말이 더 무서워서 그가 눈물로 부탁했습니다. “천사님! 그래도 부끄러워서 도저히 이런 집에서 못살아요. 저를 세상에 다시 보내주시면 충성하다 올 테니 다시 세상에 보내 주세요.” 그렇게 발버둥 치다 꿈에서 깨었습니다. 그 후 그는 교회를 위해 최선을 다해 충성했습니다.
 
   항상 천국 상급을 꿈꾸며 더욱 충성하십시오. 어떤 분은 주일에 1시간 이상 차를 몰고 와서 예배하고 충성합니다. 하나님이 그 모습을 얼마나 기뻐하실까요? 어떤 집사님은 큰 식당을 하는데 식당을 하루 닫으면 몇 천만 원을 손해 보지만 그래도 주일에는 꼭 닫습니다. 그러자 다른 6일 동안 손님이 더 몰려와 이틀 전에 예약해야 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사랑으로 헌신하면 하나님이 반드시 축복으로 갚아주십니다.
 
   사랑은 자기 간까지 빼주면서도 기뻐하게 만듭니다. 역대상 29장을 보면, 다윗이 “주의 전을 위해 내 힘을 다해 드렸다.”고 기뻐합니다. 그러자 백성들도 왕을 따라 바치면서 기뻐서 어쩔 줄 모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니까 받아서 좋은 것이 아니라 드리면서 그렇게 좋아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즐겁게 나누게 됩니다. 그 나눔을 모든 사람이 다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나눔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이번 제주 총회를 위해 우리 교회는 힘써 헌신했습니다. 해외에서 고생하는 목사님과 선교사님들에게 최대한의 안식과 기쁨을 드리려고 좋은 호텔을 잡았습니다. 그러자 이런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왜 그렇게 좋은 호텔을 잡았느냐? 그 돈을 절약해서 선교지로 보내지.” 언뜻 보면 굉장히 정의로운 말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헌신하지 않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일이 아닙니다.
 
   헌신 대상은 전적으로 헌신자의 마음과 가치관과 감동에 따라 정하는 것입니다. 선교지에 유치원을 짓는 것도 소중하지만 선교지에서 고생하는 선교사님이 오랜만에 고국에 방문했을 때 좋은 잠자리와 식사로 대접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소중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정으로 자기 교회 몸집만 키우는 교회 이기주의를 벗어나지 못하면 문제가 되지만 순수하고 선한 나눔을 남이 왈가왈부하면 안 됩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후진양성에 써달라고 대학에 백억 원을 기증하자 누가 이렇게 불평했습니다. “지금 선교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굶는데 왜 대학에는 그렇게 거금을 기부하면서 선교지에는 한 푼도 안 보냅니까?” 언뜻 보면 정의로운 말 같지만 사실상 그 말은 그가 할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선교하고 싶다면 조용히 자신의 물질을 선교지로 보내면 됩니다.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예수님께 부은 여인에게 가룟 유다가 주도해서 그녀를 비판했습니다. “왜 그 물질을 낭비하느냐?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지.” 언뜻 보면 대단히 정의로운 말 같지만 자기 헌신이 없이 말만 정의롭게 하는 가룟 유다의 정의는 진짜 정의가 아닙니다.
 
  <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 >
 
   본문에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했던 한 여인이 주님에게 최선의 헌신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1. 예수님과 몸으로 만나는 것
 
   어느 날,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했습니다(36절). 그의 이름은 시몬이었습니다(40절). 왜 그가 예수님을 초청했을까요? 예수님에 대해 알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고 예수님이 위대한 선지자인지 시험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의도로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근처에 살던 한 죄인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예수님의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부은 것입니다(38절).
 
   당시 성별된 존재에게 기름을 부을 때는 머리에 부었는데 그녀는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것은 선 채로 머리를 꼿꼿이 들고 예수님의 머리에 향유를 부을 수 없다는 지극한 겸손과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그때 그녀의 모습은 관능적인 모습으로 오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신체접촉을 용납했습니다. 사람들의 평판보다는 상처 입은 한 영혼의 회복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 접촉을 통해 그녀는 모든 상처와 영혼이 치유되는 체험을 했을 것입니다.
 
   어린애들은 배가 아플 때 엄마 아빠가 손으로 배를 문질러주면 다 나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누군가의 사랑의 손길을 경험하며 사랑의 접촉을 해야 살 수 있는 존재입니다. 그처럼 성도도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을 체험해야 합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과 몸으로 접촉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예수님과 몸으로 접촉합니까? 영매가 필요합니까? 아닙니다.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예수님의 사랑의 손길이 되어주는 것이 예수님과 몸으로 접촉하는 방법입니다.
 
   테레사 수녀는 행려병자들의 몸을 씻겨주고 붕대를 감아주면서 예수님과 접촉했습니다. 그때 행려병자들에게 수녀님의 손길은 예수님의 손길이었고, 수녀님에게 행려병자들의 몸은 예수님의 몸이었습니다. 사랑은 관념이 아닌 몸의 접촉입니다. 그처럼 머리가 아닌 몸으로 사랑하고 섬길 때 주님은 우리를 통해 어둔 세상을 어루만지고 그때 예수님도 그 가운데 현존하실 것입니다.
 
   이제 능력을 받겠다고 이상한 집회를 쫓아다니지 마십시오. 예수님의 능력의 손길을 체험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능력 있는 주의 종으로부터 안수를 받지 못해서가 아니라 자기 몸을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 몸을 주님께 산 제물로 바칠 때 주님은 그를 통해 세상을 새롭게 만드실 것입니다.
 
  2. 하나님과 마음이 통하는 것
 
   기도는 ‘필요의 표현’과 동시에 ‘마음의 소통’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통해 마음도 토로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마음으로 느끼기도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의 소통이 없이 바리새인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시험하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 사람이 만일 선지자라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다(39절).” 아마 속으로는 이런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 비싼 향유를 왜 낭비하는가? 차라리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지.”
 
   사람은 누군가 탁월한 헌신을 하면 칭찬보다는 시기하는 마음을 가지고 자신이 헌신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찾으려고 이상한 논리들을 구사할 때가 많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리새인 시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런 죄인의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저건 어리석은 낭비야! 어디 예수님이 그 죄 많은 여자를 어떻게 대하나 보자!”
 
   시몬은 그녀의 현재의 놀라운 헌신은 보지 않고 오직 그녀의 과거의 전력만 보고 정죄했습니다. 정죄가 무엇입니까? 사람을 과거의 나쁜 모습으로 규정해버리고 사람의 변화의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고집스런 편견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사람을 볼 때 과거의 모습이 아닌 미래의 모습으로 보시고 그 미래의 모습을 성취하도록 사랑으로 도와주십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죄인임을 알았지만 그녀가 나름대로 사랑을 표현하도록 허용하심으로 그녀의 깊은 곳에 숨겨진 순결함이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사랑 방법입니다.
 
   그 예수님의 마음도 모르고 시몬은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면 그녀가 죄인임을 알았을 것이고, 만약 예수님이 그녀의 행동을 그냥 용납하면 진짜 선지자가 아닐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그런 판단하는 마음을 아시고 주님은 물었습니다. “시몬아! 오십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과 오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 있는데 둘의 빚을 탕감해주면 누가 더 탕감해준 사람을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대답했습니다. “많이 탕감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 대답을 듣고 주님이 시몬에게 말했습니다. “너는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인은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내 발을 닦았다. 너는 내게 입 맞추지도 않았는데 이 여인은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값싼 감람유도 붓지 않았는데 이 여인은 값비싼 향유를 내 발에 부었다. 그것은 이 여인이 더 많은 죄를 탕감 받아 나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의 많은 죄가 사함 받았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수군거렸습니다. “저가 누구기에 죄도 사하는가?” 그러나 주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예수님은 그녀의 마음을 받아주셨습니다. 얼마나 긍휼이 넘치는 주님입니까? 이제 누군가 연약한 사람을 대할 때 예수님의 마음으로 그를 대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3. 어려운 이웃과 나누는 것
 
   시몬은 율법은 열심히 지켰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처럼 예수님은 예수님의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외롭습니다. 요새도 사방에 교회와 교인은 많지만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적습니다. 누가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의 빚을 진 자로서 그 빚진 사랑을 갚으려고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힘써 도우십시오. 이웃을 위해 눈물을 흘리면 눈이 밝아집니다. 영안이 있기를 원하면 제발 관상기도를 배우러 다니거나 예언의 은사를 가졌다는 사람을 쫓아다니는 집회 중독 성도가 되지 마십시오. 그 시간에 차라리 나눔을 힘써 실천할 때 영안이 더 좋아집니다. 사람은 인색함의 감옥에서 벗어날 때 영안도 깊어지고 은총과 기쁨의 샘도 넘치게 됩니다.
 
   주님을 사랑하면 주님께 많이 드려야 하지만 드릴 주님이 세상에는 안 계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의 뜻을 따라 거룩한 일에 드리면 됩니다. 그때 꼭 염두에 두어야 할 중요한 ‘드림의 기초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힘 있는 곳이 아닌 힘이 없는 곳에 드리고, 물질이 넘치는 곳이 아닌 물질이 없는 곳에 드리고, 물질을 잘 쓰지 못하는 곳이 아닌 물질을 잘 쓰는 곳에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드림만큼 나눔도 중요합니다.
 
   지난 총회 직전에 몽골로 선교를 떠나는 한 절친했던 대학 동기동창을 만났습니다. 서울대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은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무슨 감동이 생겼는지 연구소를 떠나 40대 후반에 미국에 가서 남침례 신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리고 50대 초반에 몽골 국제대학의 생물학과 교수 및 선교사로 떠나는 그 친구를 거의 10년 만에 만났습니다.
 
   거의 무일푼으로 무작정 사명을 따라 선교를 떠나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서 물었습니다. “사례는 있어?” 사례는 있지만 한 달 사례가 고작 200불이었습니다. 안타까워서 또 물었습니다. “후원자는 있어?” 그러나 사역 초기여서 후원자도 거의 전무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중고차라도 한 대 후원해주고 싶었지만 총회 재정문제 해결이 시급했기에 아무런 도움이나 약속을 주지 못하고 그냥 몽골로 떠나보냈습니다. 그 친구 이름은 김 영수입니다. 김 선교사님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김 선교사님이 울란바토르에 도착하던 날, 황량한 공항에서 심한 교통체증을 뚫고 몽골 국제대학 기숙사로 들어갈 때 늦둥이 초등학생 아들이 펑펑 울었다고 합니다. 미국에서 보던 깨끗한 집들과 푸른 잔디와 잘 정돈된 거리 대신에 갑자기 회색빛 거리와 비포장 인도와 먼지 날리는 중고차들을 보면서 선교하는 아빠를 따라 나선 어린 아들이 얼마나 서러우면 그렇게 울었겠습니까? 그처럼 수많은 선교사님들이 문화 충격과 가족의 눈물과 상처를 무릅쓰고 선교지로 갔기에 지금까지 복음의 전진이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전방 선교사들을 위해 우리의 소중한 물질이 쓰이면 얼마나 유용하게 쓰이겠습니까? 
 
  < 은혜는 나눔을 도전합니다 >
 
   은혜는 ‘자기를 위한 보신의 삶’을 ‘남을 위한 헌신의 삶’으로 만듭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은 자로서 이제는 “예수님이 나를 위해 죽으려고 오셨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한 차원 더 나아가 “예수님이 나를 향해 죽으라고 하신다!”고도 생각하십시오. 부활의 영광이 있기 전에 꼭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죽음과 버림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진리에 정통해지려면 나눔은 성도의 선택과목이 아닌 필수과목입니다.
 
   진짜 은혜는 나누게 만듭니다. 가진 것을 혼자 다 써도 항상 부족할 것 같은데 어떻게 나누며 삽니까? 그래서 은혜가 없으면 나눔은 힘들고 두려운 일이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으면 나누고 싶어 못 견디는 사람을 만들다가 마침내 기쁘게 나눔을 실천하게 만듭니다. 그처럼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성경 마가복음 14장에는 본문과 비슷한 장면이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이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의 머리 위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때 가룟 유다의 선동에 의해 사람들이 분노하며 소리쳤습니다. “왜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지!” 그때 예수님이 말씀했습니다. “가만둬라! 너희가 왜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했다.”
 
   그때 비판자들은 사랑을 돈의 가치와 연관시켰지만 옥합을 깨뜨린 그녀는 사랑을 절대가치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생명과 사랑으로 알고 전부를 바치는 사람에게 “돈을 낭비했다!”는 말은 얼마나 모독적인 말입니까? 왜 그런 모독적인 언사를 씁니까? 헌신하지 못하는 자격지심과 질투심으로 생기는 내적인 갈등을 눌러 자기를 정당화하려고 오히려 헌신하는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얼마나 흔하게 일어납니까?
 
   나눌 줄 모르면 잘 나누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니까 대개 “왜 저렇게 물질을 낭비할까?”라고 비판합니다. 그러나 사랑 안에서는 나눔이 낭비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랑이 없기에 나눔이 낭비로 보이고 아깝게 보이는 것이다. 사랑하면 나눔은 아깝지 않습니다. 자녀를 사랑하기에 부모가 등골이 휘도록 자녀를 위해 돈을 써도 아깝지 않은 것입니다. 그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힘써 나누십시오. 주판알을 튕기면 나눌 수 없습니다. 나눔은 타산을 뛰어넘어야 가능합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유리창 넘어 바깥을 보는 사람’과 ‘유리거울로 자기만 보는 사람’입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비싼 향유를 부었을 때 유리거울로 자기만 보면 그 행위가 낭비로 보이지만 유리창으로 바깥을 보면 그 행위가 헌신으로 보입니다. 이제 유리거울로 자기만 보는 미러(mirror)형 인간이 되지 말고 유리창 너머로 남을 보는 윈도우(window)형 인간이 되십시오. 윈도우 원리로 인터넷이란 정보의 바다가 생겨났듯이 창문을 넘는 관심과 나눔이 있어야 놀라운 축복의 세계가 펼쳐집니다.
 
   나눔은 기적적인 역사를 일으키는 비결입니다. 초대교회가 어떻게 그 엄청난 로마의 핍박을 이기고 로마를 정복했습니까? 초대교회의 교부인 터툴리안은 초대교인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그들은 사랑을 위해 죽을 준비를 완료한 사람들이었다.” 사랑을 위해 희생하면 기적적인 힘이 나오지만 이기적인 모습에서는 역사를 변화시키는 위대한 힘이 나올 수 없습니다. 결국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나눌 물질이 없는 것’이 아니라 ‘나눌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세상을 떠나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결산해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살았다고 잘 보고할 수 있도록 이제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현실에 대한 집착과 이기주의로 희생도 없이 최소한의 종교행사로 체면을 차렸던 예수님 당시의 사두개인처럼 되지 않게 하소서! 이름 없는 죄인이었지만 주님이 칭찬했던 본문의 여인처럼 저도 힘써 드리고 나누고 베풀게 하소서!”
 
   이제 하나님을 위한 자신의 헌신과 충성이 어느 정도인지를 점검하며 본문의 여인처럼 최선을 다해 자신의 것을 나누십시오. 그래서 다른 이유가 아닌 오직 주를 사랑하는 이유 하나만으로 자신의 생명과 같은 옥합을 깨뜨리고 나눔의 길에 나서는 거룩한 모험을 감행해보십시오. 그렇게 나누려고 하면 하나님은 신기하게 축복의 문을 열어주셔서 나눔의 꿈을 멋지게 펼칠 수 있는 물질적인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신앙이 어릴 때는 축복받아야 행복하지만 신앙이 성숙해지면 사랑의 낭비를 해야 행복합니다. 또한 신앙이 어릴 때는 자신의 구원과 축복이 귀하게 느껴지지만 신앙이 성숙해지면 주님의 거룩한 뜻과 사명이 귀하게 느껴집니다. 기도도 초기 단계에는 복과 문제해결을 주로 구하지만 기도가 성숙해지면 하나님의 거룩한 뜻과 사명도 힘써 구하게 됩니다. 예배도 초기 단계에는 한 주 동안 지켜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예배드리지만 예배가 성숙해지면 하나님의 꿈을 품고 나눔을 결단하면서 예배드립니다.
 
   믿음과 사랑은 ‘얻으려고 나부대는 것’이 아니라 ‘나누려고 애태우는 것’입니다. 부모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더 많이 줄수록 더 행복을 느끼듯이 성도는 사랑의 낭비를 통해 더욱 행복해집니다. 우리 분당 샛별제단은 이제까지도 열심히 나누려고 힘썼지만 더욱 잘 나누는 사랑의 제단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그처럼 사랑의 낭비를 통해 내일의 큰 축복과 상급을 예비하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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